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1세 (문단 편집) === 북부 원정 및 대학살 === 하지만 윌리엄의 재위는 순탄치 않았는데 재위 중 반란이 끊이지 않아 큰 반란만 해도 5번이나 일어났을 정도였다. 윌리엄은 남잉글랜드를 정복한 후, 북부에서 반항하는 [[앵글로색슨족]] 및 [[데인#s-1|데인족]][* 윌리엄의 지배에 심하게 반항한 자들이 바로 데인족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윌리엄 휘하의 노르만인과 데인인들은 모두 바이킹의 후예로, 1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동족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라틴 문화에 동화된 노르만족과 같은 게르만 문화권인 잉글랜드에 잔류하여 자신들의 게르만 문화를 지켜낸 데인족은 조상 세대에 비해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북부 잉글랜드의 데인계 귀족들은 고대 영어의 노섬브리아 방언과 고대 노르드어를 사용했지만 윌리엄 1세는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노르만어]]와 프랑스어만 구사할 줄 아는 등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다.]에 대한 토벌 및 학살을 벌였다. 이 당시 잉글랜드는 6세기에 북독일로부터 이주해 원주민인 [[켈트]]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앵글로색슨족, 그리고 8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몰려온 데인족들의 소국들이 느슨하게 연합해 있는 왕국이었는데, 왕이 바뀌었다고 해서 순순히 따르진 않았고 당연히 반항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윌리엄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지배에 따르지 않는 북부를 초토화했는데, 이를 '''북부 약탈'''(Harrying of the North)이라고 부른다. 북부 약탈이 참혹했음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정복자가 학살을 벌임이 흔한 일이긴 했지만, 북부 약탈은 당시 기준에서도 너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리엄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한 중세 역사가 및 수도자 오데릭 비탈리스는 비록 윌리엄을 두고 칭찬할 건 칭찬하면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어떤 학자는 굶주림까지 포함하여 1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산한다. 이외에도 1069년에 덴마크의 스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여 맞서 싸워야 했다. 다만 실제로는 싸우지 않고 거금을 주어 물러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